"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요한2,13-25)
"Take these out of here,
and stop making my Father's house
a marketplace."

말씀의 초대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십계명은 처음부터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다. 그분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도 안 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며,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을 금하고 있다. 거짓 증언과 이웃의 재산을 탐내는 것도 피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선포한다. 그분께는 하느님의 힘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신다. 제물로 쓰일 소와 양을 파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전을 장터로 만들고 있다. 기도의 집이 본래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있기에 제동을 거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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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소와 양을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환전꾼들은 외국 돈을 이스라엘 화폐로 바꿔 주는 자들입니다. 성전에 바치는 돈은 반드시 이스라엘 돈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세상 걱정에 사로잡힌다면 예수님의 질책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전에서는 기도가 첫째 일입니다. 먼저 기도한 뒤에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는 '감사 기도'입니다. 한 주간에 있었던 '좋은 일'을 찾아내어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불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을 찾아내어 기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이 작업'을 한 뒤에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숨은 가르침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만이 성전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의 몸 또한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당에서만큼은 '돈과 연관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겠습니다. 미사 시간에 무슨 기도를 주로 하시는지요?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물질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결국은 들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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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참된 행복, 인간다운 삶은 '거짓 신'을 섬기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성과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최근 그 거짓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우상이 있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하느님께 두지 않고 돈이나 권력, 명예, 과학적 지식, 웰빙 따위에 둔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상 숭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목욕만 안 하면 행복할까요? 지금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목욕을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지저분하다고 뭐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이제는 매일 목욕을 해야 합니다. 하루라도 목욕을 하지 않으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따라서 과거에는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목욕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정반대의 상황인데 왜 이렇게 행복의 기준이 바뀔까요? 외부의 상황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행복이 찾아오기도 또 반대로 불행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점심에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식당 벽에 붙어 있는 그림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어떤 회사의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람들이 알게 된 그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진품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작년 그 그림의 가격이 자그마치 80억 원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무슨 그림이 그렇게 비싼가 하면서 관심을 끌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저는 80억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한 달에 100만원씩 저금을 한다고 하면(불가능하지만) 일 년이면 1,200만원. 이렇게 몇 년을 모아야 하냐면 자그마치 6~700년을 모아야 가능한 액수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비쌀까요? 이에 어떤 분이 세상에 한 장밖에 없기 때문에 비싸다고 그러더군요. 바로 그 순간 저 역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조각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조각하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조각품, 바로 '나'라는 조각품을 우리 각자는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의 것은 귀하게 여기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조각품인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담겨 있는 내 이웃 역시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지요.
이렇게 귀한 우리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만 가치를 찾으려는 마음입니다. 특별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최고라는 생각들. 그러한 생각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칭해지는 성전에서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휘두르시고,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를 엎어 버리시는 폭력까지도 행사하십니다. 왜 이토록 화가 내셨을까요?
하느님의 집이라고 칭해지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상업 행위로 어지럽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의 마당에서는 소, 양, 비둘기 따위의 제물을 팔고 사기도 하고, 로마 돈과 그리스 돈을 이스라엘 돈으로 바꾸었습니다. 소는 부자들의 제물이고, 양과 염소는 중산층의 제물이며,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이었지요. 또한 환전상이 있는 이유는 로마, 그리스 은전에는 인물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돈을 사용하면 우상숭배라고 생각했기에 로마 그리스 은전을 이스라엘 돈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각종 불의가 만연한 곳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또한 각종 불의가 만연해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라면 당장 허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몸을 성전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고 나타나시는 곳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이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을 통해 하느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어떤 외적인 것을 통해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라고 말이지요. 특히 내 자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조각품이기에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그리고 욕심과 이기심으로 거짓된 성전을 내 마음 안에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장 거짓된 성전을 허물라고 명하십니다. 대신 당신을 우리의 마음 안에 모시라고 그래야 참된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주님을 모셔야 할 내 마음을 정화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존감인 성전
-전삼용신부-
살다가 가장 힘이 빠지는 때는 '자존감'이 무너질 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자존심은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에 무너질수록 좋을 수 있지만 '자기 존재감', 즉 자존감이 사라지면 사는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기에 그것까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자존감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인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느낀 적이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자신이 사랑한 사람에게 결국엔 장난감 취급을 당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 무너짐을 느낍니다.
어떤 남자에게 한 여자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표현을 자주 했습니다. 편지를 써서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고 말과 행동으로도 누가 보아도 좋아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그 남자와도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눈치불구하고 그 여자에게 다가갔습니다. 주위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지만 그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런 시선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사실은 당신을 특별히 좋아한 게 아니에요. 당신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어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남자는 결국 여자에게 장난감 취급을 당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이 때 남자의 기분은 어떨까요? 한 여자의 장난스런 행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이 남자의 기분은 어떨까요? 자신이 한 없이 바보스러워지고 화가 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좀처럼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전 안에는 많은 장사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내쫓고 탁자를 뒤엎고 동물들을 쫓아버리는데 아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모습을 보고 시편 69장에 나오는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라고 하시며 성전은 거룩한 곳이고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권한을 보여 달라고 하는 지도자들에게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전을 짓는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며 믿지 않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아버지의 집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럽혀진 아버지의 집을 보시자 그 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그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온상들을 무력으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애착은 곧 당신의 '자존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곧 당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당신과 동일시되는 성전이 사람들에 의해 장난감처럼 짓밟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자존감입니다.
그 성전은 또한 우리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이후 병사가 예수님의 심장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상처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그리고 그 심장이 찢어질 때 성전 지성소의 휘장도 찢어졌습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성전의 심장으로 계약의 궤를 넣어두었던 곳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땅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피와 물이 나옴으로써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성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고 구약의 성전은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는 인간은 땅과 함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하늘에만 머무시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닌 '도둑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다시 성전을 지어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폭력을 쓰셨던 것처럼 우리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도 폭력을 쓰십니다. 그러나 그 폭력을 우리에게 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쓰십니다. 그렇게 산고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의 성전은 이렇게 예수님과 성모님의 산고의 고통을 통해서 탄생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다시 세워진 성전은 소중한 것이고 누가 그것을 스스로 파괴한다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산고의 고통보다 더 큰 자녀를 잃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와 물로 태어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산고의 고통으로써 더럽혀진 우리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받으신 고통입니다. '물'은 그렇게 정화되어 비로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시는 성령님입니다. 성모님께서 성령님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듯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곧 한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다시 더럽혀져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에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 안의 성전에 하느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운다면 그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사실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고 지옥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입니다. 죄인의 마음은 성전에서 지옥으로 변하게 됩니다. 마음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또다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셔서 성전을 세워주셨던 우리의 신랑을 가지고 노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이 분노를 영원한 불로 남겨놓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존감은 곧 분노를 낳게 되는데 하느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그 분의 분노도 영원할 것이고 그래서 지옥불도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성당에서 알게 된 어떤 형에게 선물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형은 저를 약간은 시기하는 듯 보였지만 저 나름으로는 형제적 사랑으로 선물을 골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만 주걱처럼 생긴 책갈피였습니다. 그 형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선물에 표현했습니다. 그 선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결국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그 선물로 퍼먹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전 재산 털어 산 선물인데 저렇게 취급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다 잊기는 했지만 가끔 생각하면 그래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물며 예수님이야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우리를 위해서 세워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 성전을 세우는 값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심장이 찢어지도록 받은 수난의 고통이고 흘리신 핍니다. 그렇게 세워주신 아버지의 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죄를 지어서 다시 못쓰게 만들어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을 두 번 찢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선물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평생 동안 그 사랑의 기억을 위해서 간직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 죽음으로써 주신 우리 마음의 성전을 쉽게 죄를 지으며 무너뜨린다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갔을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마음에 하느님께서 계신다고 믿는다면 다시 이 성전을 허물어버려 못쓰게 되지 않도록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을 조금이라도 가지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소홀히 대하면 그리스도의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변할 것들에 목숨걸지 마라
-남상근 신부-
마흔 여섯 해나 걸려서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그러다 보니
돈도 모여들었습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이권을 둘러싼 거래로
눈뜨고 못 볼 부패상이 표출되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개입하고
그에 따라 패가 갈리는 양상이 펼쳐졌습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가 봉헌되는 거룩해야 할 곳이 오히려 죄를 양산하는
타락의 온상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앞에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눈감고 모른 척하시지
않습니다. 소위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급기야 '이 성전을 허물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급진적인 태도에
유다인들의 반발이 이어집니다. 누가 뭐라 해도 성전은 변할 수 없이
확고하고 영속적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들은 다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성전이라 해도 그렇습니다.
애초의 거룩하고 순수한 목적에서 빗나간 경우에는 없어져 마땅합니다.
대충 수선해서 쓸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완전히 다 허물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라져야 하는 것, 변해야 하는 것과 지켜야 할 것, 계속해야 할 것을
식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허물어진 자리에 당신 몸을
봉헌하여 참다운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전은 다시 허물
필요가 없는 영원한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청소를 잘 하려면
-김찬선신부-
강론을 준비하면서 화장은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화장을 잘 하려면 화장을 잘 지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전의 화장을 잘 지워내고 얼굴을 깨끗이 닦아내야
그 위에 새로운 화장을 할 수 있겠지요.
마치 깨끗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려야지
그렇지 않고 이미 그려져 있는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면
아무리 덧칠을 해도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건축으로 치면 리모델링보다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낳을 것입니다.
원하는 그림을 얻고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해서는,
그래서 기존 것을 파괴하는 과격함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을 정화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성전을 허물라 하십니다.
얼마나 과격합니까?
그러나 이렇게 과격하지 않으면 이전 것의 단절이 어렵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얘기는 이 면에서 교훈을 줍니다.
"그는 어느 사순절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작은 잔을 하나 만들었다.
어느 날 삼시경을 열심히 바치다가
우연히 작은 잔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음의 열정이 헤살 당했음을 느꼈다.
마음의 소리가 하느님의 귓전에 가납되는 것이 차단되자,
그는 괴로운 나머지
삼시경이 끝난 다음에 형제들이 듣는 데서 말하였다.
'아아, 슬픕니다.
하잘 것 없는 일이 나를 덮쳐 나의 마음을 거기로 끌다니!
주님의 희생이 그것으로 방해를 받았으니
내가 그것을 주님께 희생물로 바치리라.
이 말을 하고 그는 작은 잔을 불 속에 던져 태워버렸다."
이런 과격함과 단호함이 없으면
이전 것의 정화, 청소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제가 부산 봉래동 성당에 있을 때 일입니다.
그때는 사제 형제의 수가 부족해서 혼자서 사목을 하고 있었는데
밤에 신자들이 썰물 빠지듯 다 집에 돌아가시고 나서
문단속하고 수도원에 들어오면 그렇게 외롭고 허전하여
자동적으로 T.V를 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읽고 내일 강론을 준비해야지 마음을 먹어도,
마음 뿐 손은 저절로 T.V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기를 며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길로 아예 T.V를 없애버렸습니다.
머뭇거리면 안 될 것 같아 즉시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휴게실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T.V가
휴게실만 중심을 차지한 것이 아니고
제 마음에도 주님 대신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T.V를 치운 순간 하느님이 제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오시고
음악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렇게 감미로웠습니다.
외로움과 허전함도 사라지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차향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느님 모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Radicality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프란치스코도
하느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는 radical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위해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 그 많은 재산을 다 포기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성전으로 만드시기 위해
당신의 형제를 버리고 우리를 당신 형제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
심지어 당신 성전을 허무셨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하느님 집에 대한 열정을 느낀 제자들처럼
어떤 결기를 느낍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결기 말입니다.
회개의 사순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결기가 아닐까 묵상해봤습니다.

위선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기위선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기
-배광하신부-
우리의 믿음
사제로 수품 되기 전, 주교님과 함께 가졌던 피정 마지막 밤 주교님께서는 함께 수품 될 동창 신부와 저를 부르신 후 순명과 독신 서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하신 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천천히 읽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경의 믿음대로 살고 교우들에게도 그 믿음을 가르치라 하시며, 또 서명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
그날 밤, 이 믿음의 신앙문을 읽어 내려가던 저의 눈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신앙고백 한 단락 한 단락 믿음의 내용 때문에 2000년 가톨릭 교회의 역사 안에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고통과 죽음의 길을 걸었는지…. 이 믿음의 내용 한 소절 한 소절에는 그야말로 피와 눈물이 흥건히 젖어 있는 순교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 같은 거룩한 순교의 믿음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에 저같이 부족한 이가 사제로 들어선다고 생각하니 죄스럽고, 송구스러우며, 감격스런 감동의 눈물이 흘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때마다 고백하는 이 믿음의 내용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이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든, 그 한 소절에는 순교의 처절한 믿음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소중한 신앙의 가르침을 오늘도 말없이 실천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자신의 몫을 충분히 다하고 사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를 세우시고, 죽음의 십자가로 그 교회의 반석을 견고히 하신 예수님의 교회 사랑에 우리도 열정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진정 당신의 몸과 성전을 동일시하였던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교회 역시 많은 시행착오와 잘못된 불협화음이 있었고, 또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세상 많은 종교들 가운데 사랑과 존경의 인정을 받게 된 데에는 교회를 사랑하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던 많은 분들의 눈물어린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지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때 분명히 보았습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요한 2,17)
십자가를 살아라
2007년 10월,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의 모임인 목회 사회학 연구소에서 2006년 그들의 포럼 자료를 엮어 출간한 책 '그들은 왜 가톨릭 교회로 갔을까?'에는 개신교 신자였던 이들이 가톨릭으로 신앙을 바꾼 이유를 여러 가지로 꼽고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신비적 이미지의 전통적 전례'였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미사를 비롯한 여러 전례가 장엄하고 신비적인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쉼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주기 때문' '묵상을 하는 종교'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는 교회' '외부 요인에 대한 발 빠른 융통성,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보편 교회로서의 결속력이 있는 교회' '성직자, 수도자들의 청렴성, 교회 재정의 투명성' '정의와 인권 등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등을 꼽았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장점으로 꼽히는 이 같은 이유 등은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신학자들의 깊은 성찰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고 양심 한켠에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은, 과연 우리가 남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그 장점들을 그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남들은 우리의 장점을 알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우리의 장점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가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실로 자신 없는 대답이 나올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여러 전례를 지루하고 지겨워하였고, 쉬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더 높은 담을 쌓았으며, 묵상 보다는 많은 소란과 혼란 속에 살았고, 약자들 편에 서기 보다는 있는 자, 권력에 기대기를 좋아하였고, 외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보편 교회로서 결속력은커녕 교구와 교회의 이기적인 골이 더 깊었으며, 성직자 수도자들은 날로 사치와 부유함이 늘어났고, 정의와 인권과 사회봉사에는 눈을 돌리고 화려한 성전의 치장에 급급하였습니다.
이 모든 거짓과 성전을 상술에 이용하려는 악행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노의 채찍을 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실로 당신 희생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실로 우리의 거짓된 위선을 뉘우쳐 회개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세번째 멸망 "
-이기양신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46년이나 걸려서 세운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유다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 삶에 있어서 성전은 대단히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으로 유다인들은 모든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지내게 됐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오직 그 곳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유다인들 생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성전의 개념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건축과 파괴를 되풀이했습니다.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은 기원전 961년 왕권 강화와 신앙과 정치, 백성 간 일치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고 성전은 유다인들 영원한 신앙의 고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 구심점이었던 성전은 나라 멸망과 함께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약탈당하고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고 맙니다.
두 번째 건축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 칙령으로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515년 즈루빠벨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지만 자신이 정복한 모든 곳을 헬레니즘으로 통합하려는 알렉산더 대왕 정책으로 성전은 이교도들 손에 무참히 모독을 당하게 되고 상당 부분 파괴됩니다. 그리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돼지로 제사를 지내며 유다인들 종교를 뿌리 뽑으려했습니다.
그 후 기원전 64년에 로마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면서 성전이 파괴되지만 헤로데왕이 유다인들 환심을 사려 세 번째로 그리스ㆍ로마 양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기 시작해 기원 후 63년에 완성됩니다. 하지만 70년께 로마에 의해 또 다시 폐허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세워졌던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것이 파괴됐고 지금은 간신히 남은 성전 한 벽면이 '통곡의 벽'이 되어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옛날 성전 자리에는 아랍인들 모슬렘 사원이 들어서 있고 유다인들의 간절한 바람은 그 곳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인들 신앙의 고향인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말씀대로 형상도 없이 파괴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혹하리만치 성전 파괴를 말씀하신 이유는 지나치게 건물에만 얽매여 사람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끝까지 배척하는 유다인들에게 성전의 참 의미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분, 바로 예수님이 사흘 안에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약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십자가상 제사를 통해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자들은 동물 대신 미사 때 예수님 몸인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신 예수님 몸을 모시고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 몸을 받아 모시는 신자들 역시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라며 신자들 몸을 성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즉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이들 안에 계시고 성령이 머무르시는 신자들 몸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탐욕과 미움, 죄에 물들어 있다면 주님께서 오늘 뜨거운 열정으로 성전을 정화하셨듯이 우리도 회개를 통해 깨끗이 정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무리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성전 정화의 의미이고 깨어서 사순시기를 사는 구체적 방법인 것입니다.

만나려는 하느님과 만나야 할 하느님
-안병철 신부-
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이요 구심점
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날마다 희
생 제물과 번제물을 봉헌했으며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사도 3,1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대 축제인
파스카 축제, 오순절 축제, 초막 축제를 거행하며 한 해를
지냈는데 그때 마다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
례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행해 왔던 그
축제들은 한결같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제가 거
행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
는 소중한 장소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특권 받은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성전 의식을
준수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형식주의에 사
로잡혀 성전 의식을 오염시키는 행위들을 단호하게 단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머지
않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임을 예고하시며 성전이
더 이상 장사꾼들의 상거래 장소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고 경고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야 비로소 지
난날 스승께서 보여주신 성전에서의 행위가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
해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경신례가 거
행될 바로 그 성전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은 경고의
말씀을 쏟아내십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특권 받은 장소
인 성전이 상업주의에 물든 인간들에 의해서 더 이상 훼손
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성전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어
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시나이 산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하느님이 이스라
엘 백성이 섬기던 하느님이셨다면, 신약 백성의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한없는 사랑을 쏟아 부어주시며 우리와 함
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무
한한 사랑을 온몸으로 전해주신 예수님 안에서 그 하느님
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현존을 표명하고 계십니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당신의
몸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성전이라 하신 예수님
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 담겨진 예수님의 경고 말씀과 계시 말
씀을 분명하게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개인적인
욕심이나 욕구가 빚어낸 신을 섬기고픈 인간적인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 버려야만 합니다. 동시에 나약한 본성에 의
해 좌지우지되어 온 우리의 왜곡된 삶을 바로 세우려는 노
력을 치열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형식주의와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나야 할 하느님이 만나고픈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감
히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오늘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성전 뜰에는 제물로 바쳐야 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고, 외국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외화를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물들을 내어 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둘러엎으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성전을 관리하는 사제들과 결탁한 사람들입니다. 사제들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고 상인들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상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런 행패를 하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상인들은 숫자적으로도 우세합니다. 열두 제자들이 합세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요즘의 조직폭력배와 같이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신약성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이 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은 이 사건이 예수님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것으로 보도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기원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을 환영하는 군중이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 소요가 성전에까지 가서 어떤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사건 후 사제가 중심이 된,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은 예수님을 더 이상 살려 둘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체포되고,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일을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성전에서 일어난 소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라고 씌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기도의 집이나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이사 56,7; 예레 7,11)이 이미 사용한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을 예수님이 정화하여 그것의 본 의미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 공생활의 시초에 옮겨다 놓으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일생 동안 하신 일이 성전의 의미, 곧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의미를 새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습니다. 한 분이신 야훼, 하나인 이스라엘, 하나인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인 성전이라는 뜻으로 타지방에는 회당만 두고,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만 두었습니다. 그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로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성전에 봉사하는 사제들의 권위와 우월감도 높아졌습니다. 따라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의미는 희석되고, 성전은 사제들의 권위를 나타내고 그들의 잇속을 챙겨주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를 높이고 자기 잇속을 챙깁니다. 사람이 돋보이는 곳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의미를 왜곡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팔아서 그들 자신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주제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러러보아야 하는 기득권자들의 권위 안에 살아계시지 않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에서 사제들이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수입을 올리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가미된 표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의 일은 사람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행세하는 권위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하는 헌신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단어는 그분이 부활하신 후 신앙인들이 성찬을 거행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계시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거행하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성사 안에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신앙을 쇄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실패를 겪으셨지만, 신앙공동체 안에 나타난 성찬과 신앙인들의 삶 안에 그 쇄신은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성전 혹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권위를 가진 사람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성찬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몸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도 그렇게 은혜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롭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배운 것은 경쟁에서 이기고, 재물은 많이 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와 불행을 예사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그런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돕고, 나누면서 헌신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하느님의 방식에 충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유대교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발족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방식을 배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성찬으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 곧 내어주고 쏟으신 실천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성전 정화
-강버들신부-
어릴 적 다니던 성당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기억 속 성당 입구에는 여러 사람이 손을 잡고 둘러싸야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왼편에는 성모동산이 있었고 등나무 아래에는 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란 성당 벽은 흰색이었고, 천장에 달린 전등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소한 모습 하나하나가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성당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성당에 관심과 사랑이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성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지 40일 만에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열두 살 때에는 아버지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부모에게서 떨어져 성전에 남으셨습니다. 나자렛 생활 동안에도 해마다 과월절에는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입니다. 공생활을 하시던 중에도 주기적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며, 사랑과 존중을 받아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한 성전이 오늘 복음에서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예수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과거, 하느님께서는 양과 염소의 우상을 섬겼던 이집트인들에게서 이스라엘을 빼내시고, 시나이 산에서 금송아지를 부수어버린 분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합당하고 온전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적당히 예의를 차리려는 사람들로만 가득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성전에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온몸으로 사랑의 응답을 드리려고 노력하셨던 예수님께서 채찍을 드셨습니다. 잘못된 모든 것에 하나도 빠짐없이 채찍이 닿도록 하셨습니다. 잘못된 것이 담긴 그릇을 쏟아버리셨습니다. 잘못된 것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도록 엎어버리셨습니다. 잘못된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도록 치워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하느님의 성전'이셨습니다.
성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내치시는 그분의 마음과 행동은 성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내 안에 오직 '주님의 집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신 분'만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순시기동안 내가 참된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온전하게 사랑을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정화의 손길이 나의 손길이고 싶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거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불순명한 아담과 하와 이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세상의 권세를 잡은 악령과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따라 살았기에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있고 삶의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모든 불의와 탐욕과 악의가 가득하고 욕심 ·살인·분쟁·미움 등의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법과 제도를 바꾸어 놓아도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가정도 사회도 세상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조상 대대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정기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에 빈손으로 성전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집에서부터 흠 없고 깨끗한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다인들의 마음은 부요해지기 시작했고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집에서부터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좀더 편리하고 쉽게 예배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은 편리를 추구하는 심리를 이용해 자기들의 세속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장사꾼들을 성전에 끌어들였습니다.
제물은 제사장들의 합격 판정을 받아야 제단에 봉헌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사꾼들은 자릿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뇌물 거래와 부패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편리주의와 제사장들의 세속주의, 장사꾼들의 상업주의가 예루살렘 성전을 시끄러운 장터로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의미보다 양을 잡아 드리는 외적 행사에 더 치우쳐 성전의 본뜻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인 교회에 마음을 많이 기울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의미는 건물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건물인 성전에서 마음의 성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건물 성전 정화에 대한 말씀이며(요한 2,13-17), 두 번째 단락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으로 내보일 마음의 성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2,18-22). 곧 구약의 건물 성전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신약의 마음의 성전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성전 안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로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채찍을 만드시어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2,16)고 책망하시며 그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십니다. 우리는 음식을 깨끗한 그릇에 담습니다. 지저분한 그릇에 담긴 음식은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저분한 그릇에서 병균이 오염되었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 꽉 찬 곳에는 예수님이 머무실 수 없습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려면 내 안의 더러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인류는 자기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를 그르쳤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죄악으로 어두워지고 더러워져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령이 임하시는 성전으로 바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성전은 어떠합니까?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신데 내가 주인인 양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내 기분과 감정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던 유다인들처럼 편리주의를 추구하고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것과 꼭 같습니다. 마음을 다해 예물을 준비하기보다는 적당히 대충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미사 참례를 한다면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채 타성에 젖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셈일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정화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이 되길 원하시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2,19)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쓸모없게 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신 것은 당신께서 몸소 다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행위가 바로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성전이 성전답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는 온갖 장사꾼이 활개를 치고 있어 하느님께 기도해야 할 거룩한 성전이 세속화되고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파리와 벌이 꽃에 앉아 꿀을 먹습니다. 파리는 꿀을 먹고도 본성이 이끄는 더러운 곳에 날아가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꿀벌은 꿀을 안고 자기 집으로 날아가 꿀을 저장합니다. 내 마음이 청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복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닌 것은 쫓아내고, 물질에 대한 욕심은 쏟아버리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엎어버려 하느님이 계실 수 없는 성전을 허물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거처하시기를 원하셨던 그 상태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편리주의와 상업주의와 세속주의를 우리의 힘으로는 추방할 수 없기에 세상의 모든 욕구를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도록 합시다.

성전을 허물어라
-장재봉신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탈출시키십니다.
탈출기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때로 단호하고
혹은 매정하기도 하지만
절절이 하느님의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먹이고
재우고
어르고 달래며 60 만 명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향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내리 40년 동안
하느님의 현존을 모시고 지냈던 그들의 여정을 살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얼마나 하느님마음이 답답했을지,
탈출기를 읽는 우리네 속이 갑갑하고
이런 무지렁이 집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이 의아할 지경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로 연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 근성을 털어내기 위한
하느님의 작업은 고달팠습니다.
제사장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그들의 고집과 반항으로 몇 번이나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미 적당한 타협에 길들여지고
적당 적당히 하루를 넘기는 것으로 족했던
지지리도 못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뒷걸음질에
하느님의 뜻은
번번이 좌절되고 망가졌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그분의 자녀
그분의 제사장,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군사,
지금 우리에게 붙여진 하늘나라의 호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 삶을 살아갈 재목으로 다듬기 위해서
훈련시켰던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거듭 거듭 단련시키십니다.
그분의 백성에게 십계명을 선포하셨던 하느님께서는
이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사랑과 자비의 법으로
우리를 품어 일깨우십니다.
십계명의 뜻이
어느 인간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독특하고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 처럼
오늘 우리에게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법은
너무나 놀라워
그 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명령이기에
꼭 지켜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
더욱이 이스라엘백성들의 배신과 타락에는
그분의 외아드님이 오신다는 약속이 주어졌었지만
이제 우리에게 약속된 일은
재림의 때와
그분 나라에 이르는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오늘
"성전을 허물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서
애타는 마음을 봅니다.
성전,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네를 이르심이라 짚어 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그분을 모시되
외양만 갖춘 허수아비신앙인을 향해 힘껏 외치고 계십니다.
"성전을 허물어라"
생각과 말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우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그분의 뜻을 살아내지 못하면서
그분의 것인 양
'척'만 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견딜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분의 백성이라면서
그분의 자녀라면서
그분의 제사장이라면
그분의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이름에 걸맞는 성전의 모습을 갖추라는 명령입니다.
세상의 것을 향한 마음을 허물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적당 적당한 일들을 회개하라는 이르심으로 받겠습니다.
세상의 노예가 되어
눈치껏 살아가는 모습을 잘라내라는 명령으로 듣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버리고 부수고 허물어버릴 때
그분의 구원이 명명백백 이루어진다는 다짐이라 믿습니다.
깡그리 털어내고
몽땅 부수어
그분의 성전으로
새롭게 세움 받는 축복을 꼭 누리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 자신이 성전입니다
-공한영신부-
사랑하올 교우 여러분! 부활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금년부터 강론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의 복음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을 신자들과 함께 두 번 암송합니다. 오늘도 먼저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해 보겠습니다. 한번 큰 소리로 따라 해보십시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한 번 더 암송하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해방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찾은 성전은 장사꾼들로 소란하였습니다.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환전상들에게 화를 내시며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을 내쫓고 환전상의 상을 둘러엎으며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사가들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한층 과격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의 모습을 보고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2,18)하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요한2,19)하며 예수님의 능력과 권한을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주요 내용입니다.
성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은 3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섬길 때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기도할 때는 자신의 삶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성전에서의 기도는 참된 기도일 수 없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이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것도 하느님을 잘못 섬기는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 자신(몸)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물을 드리며 기도합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15,5) 하셨듯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만남은 성전 안에서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자신(몸)이 성전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7)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기도하며 사는 우리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1코린 6,19)하시며 우리 몸이 성전이고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이 머무시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면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을 몰아내야합니다. 성당에서의 모습과 성당 밖에서의 이중적인 신앙생활,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는 안일한 자세,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앙, 남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마음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성전이 됩니다.
얼마 전 "하느님은 항상 3등입니다."라는 글을 읽고 많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이고, 2등은 해야 할 일이며, 3등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느님은 항상 3등입니다. 먼저 내 힘으로 한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가까운 친구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3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항상 나에게 1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울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나에게 1등입니다. 나도 하느님을 1등으로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1등이신 하느님을, 나도 1등이신 하느님으로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의 글인지 모르지만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1등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성전이 아니겠습니까?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내안의 죄를 알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성령 안에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는 동안 우리 자신을 성찰과 참회, 보속함으로 정결하게 하여 주님의 성전이 되도록 합시다.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아멘.

정화를 통한 해방과 자유
-조욱현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계약'과 '정화를 통한 해방과 자유'이다. 계약을 통하여 받은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해 인간이 행하여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제1독서: 출애 20,1-17: 우리는 모세에게 율법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된 땅으로 갈 때,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주셨다. 이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신 분이시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십계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종살이'를 벗어났다는 보증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해방'과 '정화'를 끊임없이 요청하신다. 즉 처음의 세 계명으로 하느님께 달아들고, 나머지 일곱 계명으로 사랑과 존경으로써 형제들을 더욱 사랑하며, 보다 더 매순간순간 떨어질 수 있는 거짓된 우상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진정한 해방을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나 율법주의 혹은 순전히 의미를 잃어버린 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복음: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성전정화의 의미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잘못을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며,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2,16).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이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곳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하느님 안에 진정한 자유를 느껴야 하는 곳인데, 이 모든 것이 타성적인 것으로 습관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그 가치관을 바꾸어놓는 말씀이다. 즉 하느님의 현존과 또 그분과의 결정적 만남의 장소인 성전의 예식 기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 결과 알맹이가 빠진 예식 자체가 천박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옛 예식과 당신 자신을 교체해 놓으신다.
예수님의 이 격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18절)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암시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하고 대답하셨다...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19-21절). 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두고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마태 12,24)며 예수께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징표를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몸을, 즉 사람들이 수난의 비극을 통해 짓밟은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써 사흘 후에 부활시킬 당신의 몸을 징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징표는 당신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는 징표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개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 먼저 '내 아버지의 집'(16절)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성실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메시아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나중에 가서야, 부활을 체험한 후에 깨달았다(22절). 여기서 이 성전정화가 십자가와 수난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미 '성전'이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심으로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이제 이 성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시킨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영원히 실현되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의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의 정화가 필요하다.
제2독서: 1고린 1,22-25: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파스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다. 구원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으며, 그래서 십자가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며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 십자가는 십자가로서만 끝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 즉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느님의 계명과, 십자가, 성전의 정화에 대한 것을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우리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시는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4,15; 15,14). 만일 우리의 신앙이 '성전' 앞에만 머물러 있고 고통과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있는 신앙이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도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되고 끊임없이 정화되어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즉 구원을 차지하려면 주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잘 지키면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감으로써 '지성소'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 자신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전이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아멘!

신부님! 성당이 어디예요?"
-이건복신부-
"신부님! 성당이 어디예요?"
이 질문은 아직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이 개발 중인 어농성지에 온 순례객들이 성지 언덕에 위치한 사제관을 성당으로 짐작하고 올라가다가, 정작 성당 앞에 서 있는 저를 보고 가끔 던지는 말입니다.
성당인 줄 몰랐다는 순례객들의 말을 웃음으로 넘기지만,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하늘 높이 서 있는, '버젓해 보이는' 성당을 찾는 순례객들에게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그래도 비록 외적으로는 창고같은 조립식 성당 건물이지만, 순례객들이 어농성지 성당의 멋진 전통 한옥식 내부를 보는 순간 "와"하고 탄성을 올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미안함을 거둡니다. 그리고 "성전은 기도하는 장소요, 모셔진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라면 훌륭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성지를 찾은 순례객들에게 오래오래 성전에 머물며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전은 대체로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하느님을 경배하는 장소로서의 건물. 둘째, 예수님 자신. 셋째, 성령을 받아들인 우리 각자의 몸. 이를 종합하면 '하느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요, 하느님께 기도하는 곳이 성전이기에, 성전은 가장 거룩한 장소'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죄로 얼룩져 있다거나 하느님의 뜻이 어긋나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의 성전은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거(居)하실 수 있는 장소요, 그분의 뜻이 온전히 실천되고 있는 장소입니까? 혹, 신자와 신자 사이에 그리고 신자와 사목자 사이에 불목하는 모습을 보이는 성전이라면, 돈과 명예만을 위해 성전을 찾는 신자들이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 판치는 곳이라면, 그곳은 더 이상 성전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께서 머무실 수 없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지 않는 장소가, 더 나아가서 공동체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장소가 성전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거하실 수 없는 우리의 몸을 성전이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 온갖 부정과 부조리로 더럽혀진 "이 성전을 허물라."(요한 2, 19)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이 신앙의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하느님께서 머무실 수 없는 성전이라 단언하고 계신 바라 하겠습니다.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 기간인 사순절의 중반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 죽음의 대가로 얻게 될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부활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주님의 집을 잘 정돈해야 하겠습니다.
샤를 드 후코 신부님께서는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는 님을 두고 딴 곳을 바라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바라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성전을 만들고,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집은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교회의 뜻에 순명하며 서로가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화목한 공동체, 바로 그 자체임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생거성당 사후천당(生居聖堂 死後天堂)
-방윤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내용입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채찍을 만드시어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고 하시면서 성전에서 쫒아내셨습니다.
성당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성당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대성전입니다.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바오로 대성전 등 유서 깊고 규모가 큰 성당을 일컫는데 성전이라 이름을 붙이려면 교황청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천주교를 국교로 인정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20경 로마의 라테라노라는 곳에 세워 봉헌한 성전입니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님의 주교좌 성당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황님이 성 목요일 주님만찬미사를 이 성전에서 집전합니다. 둘때로 주교좌 대성당입니다. 교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인데, 주교좌가 있는 성당입니다. 셋째는 일반 성당, 즉 본당을 말합니다. 넷째로는 경당입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등 교회네 어떤 단체의 전용 성당으로 성체가 모셔진 성당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그런 경당에서는 주일미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어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소는 성체가 모셔져 있지 않으므로 성당이 아닙니다. 기도소요 집회소일 따름입니다.
성당은 어떤 곳일까요?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미사 감사송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이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를 날로 거룩하게 하시어,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성당에 대한 표현을 보면.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 지존의 거룩한 장막, 신령한 집, 하느님의 도성, 주님의 집, 주님의 어전` 등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자주 들러 성체 조배로 감실안의 예수님께 인사드리고 미사를 통해 흠숭과 감사, 속죄와 청원 행위를 게을리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주5일 근무제를 핑계로 주일미사를 궐하지 않도록 합시다. `생거진천, 사후용인` 이란 말이 있습니다.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란 뜻입니다.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생거성당, 사후천당`

성전의 장사꾼들
-정승익신부-
성전에서 소를 파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은 또 누구입니까? 이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닌,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은 돈으로 좌지우지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화에 도달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부귀, 맛있는 음식과 배부름, 인간적인 명예를 얻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바람과 연기와 같지 않습니까? 다 스쳐 지나가 버리지 않습니까?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지 않습니까? 이 물결에 휩쓸리는 이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바다로 떠내려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그런 탐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러한 덧없는 물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바로 (성전에서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입니다."
앞에서 들은 복음묵상은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요한복음강해" 10,6 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하느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세상의 이익에만 관심을 보이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예수님께서 몰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는 대목을 접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전의 장사꾼들", 즉 겉으로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만의 사리사욕이나 세속적인 물질이나 옳지 못한 세상의 관행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현대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을까?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신자"일까, 아니면 아직도 어정쩡하게 반쯤은 "장사꾼"의 모습으로 하느님에 반대되는 것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지? 마음 안에 반향이 왠지 죄스럽다면,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짐승들과 환전상의 탁자들을 엎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보속과 회개의 행위를 통해 마음의 "채찍"을 만들어 유혹과 악습의 관행을 뒤엎고 몰아내서 우리의 영혼을 정화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세상의 여러 욕심들을 치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이제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것들을 말끔히 거두어 내고, 하느님의 것들을 가득 채워보면 어떠할까?

거짓과 불의의 마음을 내 안에서 쫓아내도록 합시다.
-조명언신부-
꾀 많고 영리한 젊은이가 별안간 열병을 앓다가 그만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 먹은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께서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차도가 있어 지금은 퇴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병문안을 가야 하겠는데 그랬다가는 자신이 귀머거리인 것이 탄로 나겠고 그렇다고 안가자니 찍힐 것 같았지요.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병이 좀 나았다고 했으니 이에 대비해서 귀머거리가 탄로 나지 않게 사장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묘책을 생각했습니다. 그 묘책은 바로 뻔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지요.
그는 사장님을 만나자마자 "사장님, 병환이 어떠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자신이 예상했던 차도가 있다는 말 대신에 "어제 밤에 또 열이 심하게 나니 아마도 죽으려나 보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그저 좀 났다는 말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거 참 다행입니다."라고 말해요.
이 말을 듣고 사장님은 화가 났습니다. 그때 또 젊은이는 "약은 무슨 약을 쓰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화가 난 사장님은 "양잿물을 먹었다 이놈아~"하고 소리치니, 젊은이가 또 하는 말 "네, 그 약 참 좋은 약입니다. 그 병에는 그 약에 최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젊은이는 자기가 계획했던 대로 착착 진행되는 줄 알고 더욱 신이 나서 "의사는 어떤 분이 보셨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화가 난 사장님은 "염라대왕이 왔다갔다."하고 화를 냈지요. 그러자 "네 그분 유명하신 분이지요. 염려하지 마십시오."했다고 하네요.
자신의 귀먹음을 속이려다가 오히려 더 사장님을 화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젊은이가 솔직하게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았음을 사람들에게 말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단점과 결점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마음, 그래서 어떻게든 미화하려는 모습들, 그러다보니 계속된 거짓말과 불의 속에서 살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사랑을 그토록 외치셨던 분께서 손에 채찍을 드시고 사람들에게 휘두르십니다. 또한 돈을 쏟아버리고, 탁자를 엎어 버리시지요. 마치 영화 속의 깡패들의 행동 같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화가 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화를 내시지 않는 그분께서 왜 이토록 화가 나셨을까요?
바로 불의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일 년에 한번 성전세를 바쳐야 했는데, 그 돈은 반드시 이스라엘 은화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로마화폐에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이 화폐를 통해서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당시에 쓰고 있었던 로마화폐를 이스라엘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 성전 뜰에 환전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던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할 소, 양, 염소, 비둘기 등을 파는 상인들로 이 성전 뜰이 북적거렸지요. 이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는데, 다른 곳에서 가져 온 희생제물은 깨끗하지 않다고 하면서 불합격 판정을 내림으로써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하느님의 집이라는 성전을 불의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는 거짓된 말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보신다면 어떠실까요? 혹시 이 마음 역시 없어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불의와 거짓을 둘러 엎으셨듯이 우리 역시 내 안을 깨끗이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더욱 더 기쁜 부활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의 마음을 내 안에서 쫓아내도록 합시다.

생명이 솟아나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 행적은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 즉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있었던 행적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 간에 그 내용은 같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정화사건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가르침은 사건의 발생 시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의노(義怒)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모세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분 백성의 선민(選民)과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오늘 미사전례의 제1독서, 탈출기 20장이 선포하는 십계명의 증거판이 바로 그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왕을 거쳐 완성된 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전부요 심장이었다. 그러나 참담한 이스라엘 역사의 현실은 나라를 쪼개고 갈라놓았고, 백성들을 뿔뿔이 흩어놓고 말았다. 흩어진 백성들은 '시나고그'라는 회당을 지어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며 선민과 구원의 위로로 삼았지만, 늘 '새 예루살렘'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비용과 수고를 감수하며 해방절, 오순절, 맥추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순례하였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은 에제키엘 예언서에도 잘 드러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려가서 직접 본 성전에 관한 환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그러나 늪과 웅덩이 물은 되살아나지 않은 채, 소금을 얻을 수 있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에제 47,1-12) 그렇다. 주님의 성전은 생명의 물이 샘솟는 곳으로서 이 물은 생명의 양식과 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성전의 참된 상징과 의미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商魂, a commercial spirit, aggressive salesmanship)에 가려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다. 시편(122장)의 저자가 "주님의 집으로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 하고 노래했듯이 예수님의 발걸음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성전 뜰에 들어섰을 때 그 기쁨이 사라져버렸다. 하느님이 몸소 현존하여 계시기에 더 없이 거룩한 곳, 그분의 백성이 찾아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삶의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고 그분과의 만남과 친교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얻는 곳, 기도하고 참회하여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곳, 그 예루살렘 성전이 온갖 상혼들로 뒤덮여 있었다. 제사에 쓰일 동물들을 사고파는 인파들, 성전세금을 위해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 동물들 울음소리와 동전 땡그랑거리는 소리들, 흥정과 경매를 부르짖는 사람들 소리, 거기에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속임수와 바가지 소리들까지…
예수님께서는 의노의 열정으로 채찍을 내리치고 상판을 둘러엎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하셨다.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역(使役)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팔을 걷어 올리고 손에 빗자루를 손에 드셨다. 이는 유대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이며, 구약(舊約)을 폐기하고 신약(新約)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깜짝 놀라 몰려온 유다인들이 도대체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표징으로 보여 달라 요구하자, 예수님은 이미 의도하신 바를 폭로(暴露, apocalypse)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그랬다. '사람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질 신약의 새로운 성전,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6년이 걸려 지었든, 수백 년이 걸려 지었든,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든, 그 속에 치장되어 있는 어떤 유명한 화가와 작가의 작품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수없이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을 끌든, 이제 참된 하느님의 성전은 오직 하나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질 성전뿐인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 그들을 하느님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 드리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십자가 제단에 바침으로써, 그래서 죽고 묻혀 부활하심으로써 속죄와 용서의 성전, 화해와 친교의 성전, 사랑과 평화의 성전, 구원과 생명의 성전이 되신 것이다. 새로이 맺어지는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세워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그 또한 그리스도의 성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 성령의 궁전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성전의 경건함과 거룩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쉼 없이 무엇을 정화해야 하는지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양승국신부-
<이런 성당 보셨나요?>
언젠가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들어가서 성전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의 일입니다. 베드로 대성당은 규모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성당 입구부터 감실이 위치한 곳까지 걸어가는 데만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수려한 작품으로 수놓은 스테인드글라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성인들에게 봉헌된 제단들, 소성당들, 값진 보석으로 장식된 문화재들, 한 작품씩 하던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장과도 같던 베드로 대성당이 제게 준 감동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성전 중에 성전이다"는 탄성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신앙의 유산들이 앞으로도 계속 잘 보존되어야 할텐데...부디 상업주의에 물들지도 이용되지도 않아야 할텐데...그래서 앞으로도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에 와서 하느님의 자취를 느끼는 신앙의 고향과도 같은 장소가 되어야 될텐데..."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개념을 보다 확대시킵니다. 물론 가시적인 성전 역시 성전이겠지만 진정한 성전은 "건물 개념"을 초월함을 명백하게 천명하십니다.
진정한 성전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지상을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을 삶의 좌우명으로 선택한 그리스도 신자들의 공동체"가 바로 성전입니다. "성령이 활동하시는 한 신자의 영혼"이 바로 성전입니다.
저는 요즘 베드로 대성전보다도 더 아름다운 성전들, 성전 중에 성전들을 자주 만납니다.
제가 본 성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성전은 바로 이런 성전이었습니다. "말끔히 죄를 씻고 고백실을 막 나서는 한 맑고 깨끗한 영혼"이야말로 가장 성전다운 성전이었습니다.
오랜 방황의 세월을 접고 다시금 하느님 앞으로 돌아와 지난 세월을 가슴아파하는 한 회심자의 뒷모습이야말로 성전 중에 가장 값진 성전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희망하며 환하게 미소짓던 임종자의 미소야말로 제가 지금까지 본 성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었습니다.
외적인 성전 건립도 중요하지만 우리 마음 안에 먼저 하느님의 영이 거처하실 깨끗한 성전을 건립하는 이번 한 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성당을 열심히 청소하는 봉사활동도 아주 중요하지만 또 다른 성전인 우리 마음을 비우고 씻어내는 영혼의 청소도 게을리 하지 않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 방황하고 흔들리는 이 세상 앞에서 개별 교회인 우리 각자가 우리 마음 안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느님의 도성을 건립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전 정화
-강영구신부(2003-03-23)-
스승 예수께서 얼마나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하셨으면 저토록 화가나셨을까?
무엇을 하느님의 집(聖殿)이라고 하는가?
우선 예수께서 채찍으로 정화하신 돌로 지어진 집을 성전이라고 한다. 요즘 말로는 성당 혹은 예배당이라고 불려지는 건축물이 성전이다.(요한2,16)
둘째는 예수의 몸이 성전이다.(요한2,21)
셋째는 우리 자신의 몸이 성전이다(1고린3,16)
이 중에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함부로 더럽혀서는 안된다.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 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사도2,46-47).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신도들과 같은 초심으로 되돌아간다면 어찌 복받지 않겠는가?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경고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3,16-17)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을 맑고 밝고 향기로운 마음, 너거럽고 여유있는 아름다운 마음, 사랑하고 용서하는 慈悲之心으로 가꾼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오늘 우리가 불행하다면, 성전에서 하느님을 몰아내고 온갖 우상과 장사꾼 환전상 그리고 짐승들과 쓰레기 따위로 성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가슴 안에 하느님의 영인 성령은 온데간데 없고 쓰레기같은 욕망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시기질투하는 악령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쓰레기같은 욕망으로 가슴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답시고 성당과 예배당을 들락거리며, 하느님의 집을 오염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들이 하는 기도는 기껏 자기 욕망을 채워달라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셨던 스승 예수와 같이 우리도 채찍을 만들자. 그 채찍을 휘둘러 우리 가슴에서 온갖 우상과 장사꾼, 환전상, 짐승들을 몰아내고 쓰레기를 치우자. 밝고 맑은 가난한 마음으로 꾸며진 성전에 하느님을 모셔들이자.(一明)

출처
원문링크 : 사순 제 3 주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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